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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위기에 빠진 공영방송 (연세대학교 윤영철)

위기에 빠진 공영방송, 무엇이 문제인가
- 방송의 공정성 문제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윤영철



1. 문제 제기

공영방송이 위기에 빠져있다. 위기에 대한 적절한 진단과 처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위기의 심각성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공영방송이 중병에 걸렸음을 알리는 검진 결과가 도처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안일한 사고에 젖어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으며 병을 치유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공영방송이 위기에 빠졌음을 알리는 신호음에서 여러 곳에서 울리고 있다. 우선 공영방송은 정당성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공영방송은 특정한 집단, 계층, 정치세력, 이념, 지역의 이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전체 국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공영방송은 전체 국민이 합의하는 가치를 반영하고 또한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다양한 의견을 균형 있고 공정하게 다루어 사회통합의 장을 제공할 책임을 안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정치적 혹은 이념적으로 논쟁적인 사안들에 대한 편향성 논란에서 보듯이 공영방송이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당성 위기는 바로 신뢰의 위기로 이어진다. 영국의 BBC는 영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단 영국 국민들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방송시청자들도 BBC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공영방송이 전체 국민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고 있는가? 현재 한국의 공영방송은 특정 정치세력이나 이념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편파방송을 일삼는다는 지적이 제기될 정도로 신뢰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특정 채널의 뉴스가 편파적이라고 생각하는 시청자들은 그 채널에 등을 돌린다. MBC 9시 뉴스의 시청률이 SBS 저녁뉴스의 시청률에 밀렸다는 최근의 발표결과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위기는 공영방송이 상업주의적 제작방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선정적이고 쾌락적이며 심지어는 퇴폐적인 내용을 여과 없이 방영한다는 비판에서 비롯되고 있다. 상업주의의 심화로 말미암아 각종 불명예스러운 사고들이 터지는 바람에 공영방송이 곤혹스러워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공영방송의 생명은 공익성 추구이므로 영리추구에 매달리는 상업방송과는 차별성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공영방송은 광고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므로 공익성에 대한 각별한 강조가 필요한 상황인데 공영방송조차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프로그램을 양산함으로써 상업방송과의 차별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공영방송의 정체성 위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급격히 변화하는 매체기술 환경 또한 공영방송에게는 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케이블방송과 위성방송이 보급되고 최근에는 DMB가 상용화되었다. IP-TV의 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지상파 공영방송은 더욱 심화된 경쟁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광고수입을 주된 재원으로 하고 있는 이상, 한국의 공영방송은 시장의 경쟁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경쟁자들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즉 공영방송의 광고수입 전망은 낙관적이지 않다. 따라서 공영방송은 한편으로는 경영합리화를 이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고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광고수입의 감소로 인한 재정의 부족분은 수신료 수입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신료 인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야만 공영방송은 재정위기를 타개할 뿐 아니라 광고수입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시청률경쟁에 얽매이지 않고 공익적 가치가 충만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대로 공영방송의 위기는 중첩적이며 다중적이다. 위기가 여러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이런 위기국면-정당성위기, 신뢰의 위기, 정체성위기, 경영위기, 재정위기-들은 마치 사슬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느 하나만을 따로 떼어놓고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연결성이 강하다고 하겠다. 이를 테면 KBS가 수신료 인상을 통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면 공영방송으로서의 정당성 확보, 시청자들로부터 신뢰 회복, 공영성 강화를 통한 정체성 확립은 수신료 인상을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인 것이다. KBS는 수신료 인상을 위한 이러한 조건을 아직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못 찾고 있다고 하겠다.
이 글에서는 공영방송의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어 정당성위기와 신뢰의 위기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영국의 BBC처럼 국민들이 신뢰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공영방송을 우리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공영방송의 보도/시사프로그램을 바로세우기 위한 논의의 시발점을 제공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연구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 공영방송의 저널리즘 환경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이런 변화된 환경에서 공영방송의 역할은 무엇인가? 다채널 혹은 무한채널의 시대로 돌입한 현재 상황에서 뉴스매체시장은 더욱 파편화되었거나 세분화되었으며 뉴스이용자 개인의 취향과 정보욕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뉴스시장의 파편화와 개인화는 매체기술의 진보로 비롯된 변화이지만 이런 기술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개별 국가가 처한 정치, 사회, 경제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둘째, 공영방송이 추구해야 하는 공정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방송의 공정성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며 공정성의 기준과 관련된 쟁점은 무엇인가? 2004년 대통령 탄핵방송의 공정성에 관한 논란은 공정성 개념과 공정보도의 실현방식에 대해서 학계는 물론 언론계 내에서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공정성 논쟁에서 확인된 두 가지 다른 방송저널리즘 모델 -기자저널리즘과 PD저널리즘-의 차이와 그 함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선정주의가 방송저널리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2. 방송 저널리즘 환경의 변화와 공영방송

1) 주창저널리즘(advocacy journalism)과 인기 영합적 저널리즘(popular journalism)

방송저널리즘의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 21세기 방송 저널리즘이 직면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은 크게 보아서 두 가지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뉴스전달자의 주관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주창저널리즘(advocacy journalism)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흥미와 오락성을 추구하거나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저널리즘(popular journalism)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로 말미암아 전달자의 의견의 개입을 배제하고 사실성을 강조했던 객관보도 저널리즘은 더욱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우선, 주창과 오락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이 등장한 배경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요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다음 질문은 과연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객관보도 모델이 폐기처분되고 주창과 오락성을 강조하는 새 모델로 교체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필자는 모델 교체현상이 일어나기 보다는 상당기간 동안 두 모델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방송 저널리즘 모델의 변화는 매체기술의 진보와 무관하지 않으며, 방송을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맥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0세기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모델로 인정받았던 ‘객관저널리즘’도 19세기 중엽 이후 미국의 특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이해 할 수 있다. 객관보도의 역사적 배경을 탐구한 슛슨(Schudson, 1978)은 미국 언론의 상업화가 객관보도를 정착시킨 구조적 요인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정파에 관계없이 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하는 신문이 광고수익을 증가시킬 수 있었던 상황에서 영리추구에 가장 효과적인 보도 방식이 객관보도였던 것이다. 물론 객관보도 관행은 경제적 요인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측면에 서 볼 때, 객관보도를 실천하는 신문은 더욱 많은 수의 유권자들을 독자로 끌어들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객관성을 과학적 지식탐구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실증주의 풍조도 객관보도를 보편적 저널리즘 모델로 정착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21세기에 등장한 주창저널리즘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저널리즘도 시대적 상황의 변화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기술, 경제, 정치, 문화의 측면에서 방송저널리즘의 변화 요인을 살펴볼 것이다.

2) 저널리즘 환경 변화의 요인

(1) 매체의 기술 환경변화

최근 들어 의견을 강하게 드러내는 방송보도가 확산되고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방송의 기술적 환경 변화를 들 수 있다. 방송의 디지털화로 인해 무한채널의 시대를 맞이한 가운데 DMB가 실용화되고 IP-TV의 도입을 눈앞에 두고 있으므로 방송내용에 대한 규제가 대폭 완화함으로써 방송을 통한 표현의 자유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과거 소수의 지상파 채널이 지배했던 시기에는 전파자원이 희소하다는 명분아래 방송내용이 공정성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각종 책임과 의무를 부여했지만, 이제 채널의 수가 급증했으므로 각각의 채널이 나름대로의 특색과 색깔을 내도록 허용하여 채널간의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분석에 기초한 주장이다. 미국은 이미 1987년 형평성의 원칙을 폐지함으로써 규제완화를 추진했으며, 영국에서도 오랫동안 저널리즘의 덕목으로 받아들여졌던 적절한 불편부당성의 원칙을 폐지하려는 탈규제론자들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2) 민주화와 정치적 환경의 변화
또한 객관저널리즘의 한계에 대한 공격도 가치개입적 저널리즘의 등장에 하나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출입처에서 제공하는 객관적 사실중심으로 보도하는 저널리즘은 기존의 권력질서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는 연구결과는 언론매체가 체제옹호에 열중한 나머지 권력비판 기능이 잃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객관저널리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언론인의 비판능력 및 도덕적 가치판단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탐사저널리즘이 주목을 받았으며 이런 분위기는 가치개입적 저널리즘 모델이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화를 거부하거나 지연시키려는 세력과 대결했던 경험을 가진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가치개입적 언론활동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김연식 외, 2005)..

(3) 시장경쟁의 심화와 상업주의
위에서 언급한 요인 이외에도 주창저널리즘의 확산에는 시장경쟁 환경의 변화도 한 몫을 한다. 채널이 폭증함에 따라 개별 방송사 보도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이 줄어들고 있다. 케이블 TV와 위성 TV의 보급, 디지털 TV의 등장, 그리고 인터넷 방송의 확산 등으로 방송뉴스를 전달하는 매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므로 개별 채널의 시청자 수는 줄어들고 있다. 이런 현상은 방송뉴스나 탐사보도 프로그램도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과거 몇 개의 지상파 방송사가 뉴스영상을 독점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방송채널, 인쇄매체들의 온라인 진출 그리고 전문적인 인터넷 뉴스매체들은 보다 많은 뉴스 시청자들을 잡아두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뉴스매체들은 딱딱한 사실중심의 정보 전달만으로는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감정이입과 흥미유발에 능한 TV매체는 그러한 매체의 특성을 십분 살려서 새로운 형태의 저널리즘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심각하고 딱딱한 정보위주의 전통적 저널리즘에서 벗어나 흥미를 고려하거나 일반시민들을 참여시키거나 인포테인먼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포맷을 개발하고 나섰다(Dahlgren, 1995). 아무리 유익하고 교육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시청자의 관심과 주의를 끌지 못하는 저널리즘을 프로그램은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McManus, 1994). 따라서 최근의 TV 저널리즘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서 선정주의나 오락적 요소를 활용하거나 무미건조한 객관보도 관행에서 벗어나 주의, 주장을 강력하게 표출하여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주창저널리즘을 강화하고 있다(Kovach Rosentiel, 1999).

러시 림보우나 빌 오라일리와 같은 미국 TV의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상대방에 대해 거침없는 언어 공세를 펼치면서 프로그램의 흥미를 북돋고 있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은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인터넷 뉴스매체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사실인지 의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정보를 인포테인먼트로 포장하여 보도하기도 한다.

(4) 시청자 파편화와 인터넷 문화의 확산
방송 시청자의 파편화 혹은 분극화도 저널리즘 모델에 영향을 미친다. 파편화된 수용자를 뉴스나 정보를 제공하는 뉴스매체는 그 수용자집단의 이념성향이나 관심, 취향을 고려하여 콘텐츠를 제작하는 경향을 보인다. 불특정 다수이자 다양한 관심과 취향을 가진 대중을 상대로 하는 기존의 매스미디어 시대에 정착되었던 ‘전문직주의’-객관보도 관행-는 따라서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다.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거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동질적 집단을 수용자 층으로 삼고 있는 뉴스매체는 검증과 확인을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사물을 해석하는 방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편화된 수용자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뉴스매체는 사실에 대한 엄격한 검증에 입각한 논쟁보다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논쟁-경우에 따라서 욕설과 비방에 가까운 말싸움-이 난무한다. 자유분방함, 실험정신, 과감성 그리고 적극적 상호작용 등의 인터넷 문화 양식이 확산이 전통적 저널리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 테면 검증보다는 주장을 앞세우는 저널리즘 모델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또한 패러디의 도입, 게시글이나 댓글의 소개, 자막사용의 확대 등 인터넷이나 모바일 전화에서 주로 쓰이는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방송저널리즘에 차용되는 경향이 늘고 있다.

뉴스제작 과정에서 정보의 수집과 확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반면, 주장과 논쟁의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 코바치와 로젠틸(Kovach Rosenstiel, 1999)은 이런 현상을 케이블 TV와 인터넷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주장저널리즘(journalism of assertion)이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취재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기 보다는 이미 보도된 정보에 대한 코멘트(의견정보)를 늘리는 제작관행이 정착되고 있다. 특히 24시간동안 뉴스 및 시사정보를 채워야하는 뉴스전문 케이블 TV나 인터넷 뉴스사이트는 이런 의사사건(pseudo event) -기자회견, 인터뷰, 뉴스 브리핑-을 통해 나오는 코멘트정보로 방송시간을 채워나가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기자들로 구성된 취재팀을 작동하여 뉴스를 제작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코멘트, 토론, 좌담, 의견청취, 탁상공론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다. 24시간 케이블 TV가 토크쇼의 편성비율을 대폭 늘이는 경향도 이런 비용절약의 측면을 고려한 결과로 볼 수 있다.


(5) 방송 저널리즘 전문직 모델의 분화: ‘기자저널리즘’과 ‘PD 저널리즘’
방송저널리즘 프로그램의 내용 및 형식이 분화되고 있다. 뉴스전달 매체에 따라, 뉴스가 전달되는 시간대에 따라 그리고 뉴스제작에 참여하는 직업집단에 따라 TV방송 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속보성의 차원에서 지상파 방송은 24시간 케이블 매체나 인터넷 뉴스매체를 따를 수 없다. 지상파는 전문성과 신뢰성을 앞세워 논평과 해설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지상파 방송의 저녁뉴스 시청자는 그 수가 줄어들 뿐 아니라 고령화되고 있는 반면, 아침뉴스의 시청자는 지속적으로 늘어가고 있으며 연성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아침뉴스는 저녁뉴스보다 오락, 유명인사 관련 소식 그리고 범죄기사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 2004).

또한 PD들이 제작하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은 기자들이 만드는 객관보도 프로그램과는 다른 직업 규범을 따르고 있으므로 전자는 후자에 비해 제작자의 주관적, 도덕적 가치판단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PD 저널리즘이 더욱 적극적으로 주창저널리즘과 인기영합적 저널리즘의 특징을 수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모델 분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개별 방송사는 서로 다른 저널리즘의 원칙에 입각하여 제작한 프로그램들을 방영하고 있다. 개별 방송사 조직 내에도 다양한 저널리즘 모델이 혼재해 있는 상황이 도래했다. 동일한 뉴스소재라고 하더라도 기자가 제작하는 보도프로그램에 등장하는지, 혹은 PD가 제작하는 시사프로그램에 등장하는지에 따라 시각 차이를 발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기자집단과 PD집단이 생각하는 ‘좋은 방송저널리즘’의 조건이 다른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 두 집단간의 저널리즘에 대한 인식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연식 외, 2005).

3) 공영방송 저널리즘의 역할: 통합적 공론장과 사회적 자본
주창저널리즘의 확산으로 인해 특정 매체의 시각에 동의하는 시청자들이 그 매체를 통해서만 공론장을 형성한다고 할 때, 공론장 역시 파편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론장은 다양한 의견의 유통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만의 대화공간으로 전락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작은 규모의 공론장들로 쪼개진다. 즉, 시청자시장이 파편화되고 이에 적응하여 주창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채널들이 늘어남에 따라 공론장마저도 파편화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인가? 혹자는 매체의 외적 다양성을 증진함으로써 결국 매체간의 의견 차별성을 늘린다면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의 매체들을 두루 접함으로써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별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견해와 비슷한 논조를 보이는 뉴스매체만을 소비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슷한 견해를 지닌 사람들만 참여하는 대화와 토론에서 의견 다양성의 범위가 축소될 것이며 참여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접할 기회를 잃게 되어 집단사고(group thinking)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즉, 자신이 선호하는 뉴스출구만을 선별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견해들을 접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더욱 견고하게 굳어져서 관용과 타협의 능력이 약화되어 숙의(deliberation)에 필요한 시민적 덕성을 갖추기 어려워진다.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 대화하거나 토론해 본 경험이 없는 자는 극단적으로 자기견해를 옹호하거나 상대방을 배타적으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청자시장이 잘게 쪼개진 21세기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시청자들이 모일 수 있는 보편적 의사소통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미니(작은) 공론장들이 존재하더라도 이들 간의 연결망을 구축하거나 이들의 의견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대비하거나 경쟁시키거나 충돌시킬 수 있는 이른바 ‘통합적 공론장’(unified public sphere)이 필요하다는 것이다(Garnham, 1995). 비슷한 맥락에서 커란(Curran, 1991)은 ‘핵심 부분’(core sector) 미디어, 달그렌(Dahlgren 1995)은 ‘일반영역’(common domain), 썬스틴(Sunstein, 2001)은 보편적 이익을 위한 ‘매개공간’(general interest intermediaries)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어느 매체가 통합적 공론장을 제공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바로 공영방송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 사회 갈등의 심화와 양극화의 부작용을 걱정하고 타협과 통합의 길로 나가기를 고대하는 한국 사회에서 공영방송이 통합적 공론장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하겠다.

또한 공영방송은 상업방송이나 상업적 인쇄매체에 비해 공정성을 유지할 책무가 더욱 크다. 공영방송의 사명은 이윤창출이 아니며 특정 정파를 위한 선전도 아니라, 말 그대로 공익(public interest)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영방송은 국민에게 책임지는(accountable to citizen)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갈등적 사안을 편향적으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 즉, 보도의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의견의 다양성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서 공영방송이 지켜야할 과제인 것이다. 사회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공영방송의 어카운터빌리티의 목적이(accountable for what) 재정립된다고 할 때, 한국 사회에서 공영방송의 책무 가운데 하나는 사회갈등 혹은 사회분열의 극복이다. 이념, 지역, 세대, 계층별로 나뉜 상태에서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더욱 심회된다면 사회통합 자체가 위협받을 소지가 있다. 따라서 공영방송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여 이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는 데 기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공정성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시청자들이 동일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경험을 공유하고 상대방 의견을 경청하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영방송은 사회적 연결망 구축에 필요한 규범과 신뢰를 제공함으로써 시청자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증진시켜 주어야 한다.

사회적 자본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지닌 시청자들이 동일한 프로그램을 시청함으로써 경험을 공유하고 의견이 다른 상대방이라도 신뢰하면서 진지하게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의견의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공영방송이 어느 한 편을 두둔한다면 사회적 자본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공영방송의 이념적 설득을 거부하는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의 시청을 중단하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는 매체를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시청자는 진보적 매체만을 소비하고, 보수적 시청자가 보수적 매체만을 접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신뢰수준도 낮아져서 토론의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상호비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썬스타인(Sunstein, 2001) 언급한 이른바 ‘집단 양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 발생한다. 집단 양극화의 상황에 빠지면 갈등적 관계에 있는 집단들 간의 응집력이 저하되어 사회통합력이 약화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런 집단 양극화 현상을 방지하거나 치유해 줄 수 있는 매체가 바로 공정성을 잃지 않은 공영방송이다. 쟁점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든지 간에 많은 시민들이 신뢰를 가지고 시청하는 공영방송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 정파의 대리인을 자청하고 나서는 공영방송이 사회적 자본을 제대로 창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방송의 공정성 논쟁

1987년 민주화가 시작되어 권위주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한국 방송은 정권홍보의 도구로 전락했으므로 공정성에 관한 논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 정도로 정치적 편파성이 강하게 나타났다. 국가의 철저한 관리와 통제에 놓였던 권위주의 시대의 방송은 과연 저널리즘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 정도로 집권세력을 일방적으로 옹호했으며, 방송의 불공정성을 사회적 논쟁거리로 부각시키는 일 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권위주의 정권은 강도 높은 억압적 정책을 써왔다(이민웅, 1996).

특히 5공화국 시절 권위주의 정권의 철저한 통제아래 놓여 있었던 공영방송은 여권을 찬양, 미화하는 반면 야당을 ‘혼란과 불안을 야기하는 무책임한 정치집단’으로 매도하는 왜곡을 일삼았다. 특히 한국방송(KBS)은 학생운동단체를 극좌, 용공분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과격성과 폭력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편, 정부 측의 주장만을 보도는 편파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김기태, 2004). 그러나 1986년에 이르러 학생운동이나 노사분규 등 갈등적 사안을 왜곡하고 권위주의 정부의 홍보도구로 전락한 공영방송을 에 대해 시민 단체들은 반기를 들고 저항운동에 돌입했다. 기독교범국민운동본부는 다른 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방송의 왜곡과 불공정성을 규탄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운동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시청료 거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방송의 불공정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많은 시민단체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여 전단과 스티커 배포, 간행물 발간, 서명 및 캠페인 활동, 모니터, 공개집회활동을 벌임으로써 방송의 편파성을 사회적 아젠더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1987년 이후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정부의 방송에 대한 통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공영방송사 사장임명에 개입할 수 있었으므로 방송은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는 없었다. 방송사 노조가 결성되어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방송은 여전히 집권세력을 우호적으로 야권이나 /저항세력을 비우호적으로 보도하는 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강형철, 2004). 특히 김대중 정권은 언론사에 대한 세무사찰을 실시하고 탈세를 문제삼아 보수신문 소유주를 구속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는데, 정부의 입장을 두둔했던 공영방송과 보수신문들은 대립각을 세우면서 사사건건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영방송의 공정성 문제 또 다시 사회의 주요 아젠더로 등장한 것은 2004년 3월 12일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하였던 시점부터였다. 정치적 파급효과가 매우 큰 사안이었으므로 모든 뉴스매체들은 탄핵가결 이후의 상황을 반복적이고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공영방송은 정규방송 프로그램을 중단한 채 탄핵관련 프로그램을 긴급 편성했다. 그런데 탄핵관련 방송을 시작한지 하루도 못되어 방송의 공정성과 균형성에 관한 논란을 벌어졌다.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야당은 탄핵방송의 불공정성을 문제 삼았으며, 이 사안은 방송위원회의 심의 안건을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방송위원회는 탄핵방송의 불공정성 논란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언론학회에 연구용역을 의뢰하여 탄핵방송의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도록 했다. 그런데 2004년 6월에 발표된 언론학회의 대통령탄핵관련 방송 내용분석 연구가 ‘공영방송이 불공정했다’라는 결론을 내리자, 사회 일각에서는 이 보고서의 결과에 대해 반박함으로써 방송의 공정성 문제는 사회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신문과 방송 그리고 인터넷 등의 언론매체 뿐 아니라 학계, 언론관련 단체, 정치권, 그리고 일반 시민단체들이 이 보고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엇갈린 평가를 쏟아냈다.

탄핵관련 방송의 공정성 논쟁의 핵심은 크게 보아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대통령 탄핵이 보도의 공정성을 요구할 정도로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논쟁거리인가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공정성을 판단하는 기준과 잣대가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라고 하겠다. 여기서는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저널리즘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즉 과연 공정성을 요구할 만한 사안인지를 살펴보고, 이 사안이 공정성을 지켜야 할 경우라면 공정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지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1) 공정성 적용의 대상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방송 프로그램이 다루는 모든 소재에 대해 균형을 맞추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사회비판과 사회고발의 책임을 부여받고 있는 탐사보도나 시사다큐 프로그램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항상 균형만을 맞춘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예컨대, 성차별, 인종차별, 아동학대, 장애인 학대, 부패 등 누가 보더라도 지탄받을 일탈행위로 간주되는 사안에 까지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합의가 뚜렷하여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 사안이나 쟁점은 공정성 부과 대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여 명백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와 같은 사례의 경우 방송이 해당 행위를 일방적으로 비난했더라도 불공정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모든 경우에 공정보도를 요구하여 선악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방송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해치는 조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안에 대해 공정성을 요구하는가? 어떤 사건이나 행위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긍정과 부정의 양편으로 나뉘어 논쟁적인 상황 일 때, 방송은 공정성을 유지해야 할 책임을 진다고 하겠다. BBC의 제작자 가이드라인에 명시되어 있듯이 적절한 불편부당성 원칙은 ‘주요 이견들’(main differing views)이 존재하는 ‘정치적 산업적 논쟁거리’(political industrial controversy)에 대해서만 적용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 대통령 탄핵안 가결은 엇갈린 평가를 촉발했으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논쟁사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보도의 소재를 합의, 합법적 논쟁, 일탈의 세 영역으로 구분한 다니엘 할린(Hallin, 1986)의 분류체계를 적용해 볼 때 대통령 탄핵이 합법적 논쟁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할린이 이 분류를 공정성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공하기 위해 제안한 것은 아니다. 그는 언론이 동일한 사안을 다루면서도 정치,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보도영역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 모델을 도입했다. 할린은 미국 언론의 보도분석을 통해 특정 사안이 ‘합법적 논쟁영역’에 속할 때 공정성과 같은 저널리즘 규범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우선적인 관심사는 대통령 탄핵 문제가 과연 합법적 논쟁의 영역에 속하는 이슈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키워드인 ‘합법적’(legitimate)이라는 말은 대통령 탄핵 문제가 유권자 사이의 논쟁과 국회의 토론 대상이 되는 이슈냐 하는 것, 다시 말해 이슈의 성격 자체가 우리나라의 정치 과정의 주요 제도권 정치 행위자들인 유권자와 국회가 토론할 가치가 있는 이슈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통령 탄핵 문제는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전후로 해서 비단 제도정치권인 국회에서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격렬한 정치적 갈등을 빚었던 이슈였다는 점에서 합법적 논쟁영역에 속한다. 특히 탄핵안 가결이 ‘합법적’이었음은 헌법재판소에서도 그 ‘적법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의회 쿠데타’로 규정하고 이를 중대한 사회적 일탈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물론 탄핵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탄핵안 가결을 용납하기 어려운 심정이었으므로 이를 일탈로 규정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논쟁영역이란 동일 사안을 합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측과 완전한 일탈로 간주해야 한다는 측이 충돌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합의된 것으로 보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일탈로 보는 사안은 논쟁을 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탄핵안 가결이 모든 국민 모두가 비난하고 저주하는 일탈행위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탄핵안 가결을 일탈행위로 보고자 하는 측에서는 탄핵안 가결이란 모든 국민들이 비난하고 저주해야 마땅한 일종의 ‘쿠데타’ 행위이므로 ‘선’과 ‘악’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찬반 논쟁을 따질 사안이 아니거나 ‘탄핵반대’로 얼마든지 편향되어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사안인가?

그러나 탄핵안 가결은 일방적인 비난과 저주가 용인될 만한 일탈행위가 아니다. ‘김선일씨 피살사건’과 같이 일탈행위로 볼 수 있는 사안과는 다르다. 김선일씨를 납치, 살해한 무장단체를 지지하는 주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를 불공정보도로 보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이런 주장이나 행위가 ‘들을 가치도 없는’(as unworthy of being heard) 일탈적 주장 또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탈적 행위라는 언론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이라크파병, 수도이전 혹은 대연정 제의처럼 우리 국민이 반드시 반대 의견을 들어야 할 가치가 있는 논쟁적인 사안이었다. 탄핵안 가결은 그 절차의 적법성을 인정받았으며, 국회의원 3분이 2가 찬성했고, 여론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국민의 30%가 지지했던 사안이다. 17대 총선에서도 탄핵안에 찬성한 정당들은 45%정도의 정당지지율을 확보했다. 더구나 탄핵안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법적 절차를 통해 끌어내리자는 제안’이었기에 정치권 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BBC의 제작가이드라인에서 특별히 ‘due impartiality’ 기준을 강조하는 이른바 ‘중대사안’(Major Matters)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심도 있는 토론과 논쟁이 요구되는 사안이었으므로 언론매체의 사명은 찬성과 반대의 이유나 근거를 충분히 보도함으로써 ‘식견을 갖춘 시민’(well-informed citizen)을 양산해 내는 것이었다. 탄핵에 반대했든지 찬성했든지 간에 국민들은 상대방의 주장이나 그 근거를 명확하게 알아야 자신의 논지를 더욱 정교하게 개발하여 숙의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방송은 탄핵에 대한 찬성과 반대주장을 공정하게 담아냈어야 했다.

2004년 또 다른 논쟁거리였던 수도이전 보도와 관련하여 열린우리당 측은 “찬성론과 반대론을 공정하게 보도해 달라”라고 주문했다. 정당한 요구라고 하겠다. 대통령 자신이 수도이전 반대를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혹은 ‘퇴진운동’으로 느낄 정도로 수도이전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사안이다. 탄핵문제와 다를 바 없는 논쟁적인 사안인 것이다. 수도이전 반대론을 찬성론보다 많이 보도했다는 점이 불공정보도의 근거라고 보았다면 대통령탄핵 관련 방송에 대해서도 찬성과 반대를 균형 있게 보도하라고 요청했어야 했다.


2) 공정성 판정을 위한 기준

대통령 탄핵관련 방송의 편파성이 논란 대상으로 떠오른 가장 큰 이유는 공정성 여부를 판단할 기준에 대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방송법에는 공정성에 관한 규정이 있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그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실천적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공정성 판정을 위해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영국 BBC의 제작자 가이드라인이 강조하고 있는 적절한 불편부당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공정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방송사들도 나름대로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마련해 놓은 지침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방송사들이 스스로 지키겠다고 채택한 방송 제작가이드라인(한국방송, 1998)과 방송강령(문화방송, 2003)의 기준은 공정성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

3) 공정성에 관한 쟁점과 논의
방송법이나 방송사의 자체 기준에서도 공정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기준이 아직도 개념적이어서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가이드라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공정성 판정의 기준을 놓고 논란이 야기되었는데, 이 논란의 핵심쟁점은 다음과 같다.

(1) 수학적 균형을 따를 것인가?
방송의 공정성을 판정하는 기준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수학적 균형이 공정보도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BBC의 제작자 가이드라인에서 지적했듯이 모든 유형의 사안에 공정성의 잣대(불편부당성)를 부과하지는 않는다. 다만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 대립적 견해에 대해서 적절한 비중을 두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탄핵방송 내용분석 보고서에도 수학적 균형만을 공정성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문장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보고서는 계량적 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질적 연구방법을 도입했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보고서의 여러 군데에서 양적(수학적 혹은 산술적) 균형만으로는 공정성을 판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으며, 그렇기 때문에 질적 연구방법을 도입했음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양적인 차원에서 찬반의견이 7대 3 혹은 8대 2로 나와 한 쪽으로 편향되는 듯이 보이더라도, 비중을 덜 둔 의견이나 주장이 매우 견실하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면-즉 질적인 차원에서 보완이 이루어진다면- 공정성이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레임분석과 담화분석의 결과를 놓고 볼 때 탄핵방송의 양적 불균형이 질적으로 보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탄핵관련 행위자들의 이미지 프레임, 관련쟁점의 프레임 및 경쟁프레임 그리고 프로그램 사회자의 언어 활용 방식을 질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탄핵반대’ 쪽으로의 체계적인 편향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특정 프로그램의 탄핵관련 기자리포트나 진행자 멘트 분석에서 탄핵반대와 찬성이 11대 0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편향성이 극단적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2) 여론조사의 결과를 공정성의 잣대로 삼을 것인가?
국민의 뜻에 따라 공정성의 기준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다.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 조사한 여론조사의 결과가 70대 30정도로 나왔으므로 탄핵반대 지지도 70%를 ‘상황의 특수성’ 혹은 ‘국민의 뜻’으로 간주하여 이를 공정성의 잣대로 삼자는 것이었다. 언뜻 듣기에 그럴듯한 얘기지만, 저널리즘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대단히 무책임하고 위험스러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즉흥적이며 가변적이어서 항상 유동적이며 조작이 가능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라 매일 혹은 시시각각으로 공정성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 타당하지도 않으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당일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의견을 묻는 여론조사는 토론 및 숙의과정을 배제한 채 순간의 느낌과 선호만을 집계한 것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론이라고 볼 수도 없다. 또한 즉흥적인 여론조사의 결과는 탄핵안 가결 당일 반복적으로 야권을 비난하는 성향을 보였던 방송의 영향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신뢰할 만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언론매체나 언론인이 항상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고 다수의견에 따라 보도정책을 정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게 되면 언론의 자유와 비판기능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이다. 영국의 BBC는 포클랜드전쟁 당시 분쟁지역 파병에 대한 지지도가 83%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정부의 전쟁정책에 관한 문제점을 꼬집고 아르헨티나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 뉴스를 방송함으로써 공정성을 유지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견지지도를 공정방송의 잣대를 삼자는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우리 사회에서 논란의대상이 되었던 쟁점에 관한 언론보도를 어떠해야 할까? 수도이전을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67.5%, 그대로 실행하자는 의견이 27.4%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모든 언론매체가 국민투표 실시 쪽으로 편향되게 보도해야 하는가. 노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졌다는 조사결과에 맞추어 대통령에 대한 보도시각을 결정해야 하는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는 그래서 지켜지지도 않을 공정성 기준을 임기응변식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3) ‘시대정신’에 맞으면 공정방송인가?
방송사의 제작진이 가장 선호하는 공정방송의 기준은 ‘시대정신’이란 용어로 자주 표현된다. 다음은 PD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 연구에서 인용한 부분인데, 이를 통해 제작진을 시대정신을 약자와 강자의 대립구도에서 약자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계적 중립과 균형성보다는 시대정신의 발현을 가장 중요시하고 시민사회에 기반한 공공성, 공익을 확보하기 위해 소외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가능한 한 기자들이 제공하는 뉴스와 차별적 시각을 구성하려고 노력한다”(시사 투나잇 PD 인터뷰, 한국언론재단, 2005, TV 장르와 방송저널리즘: 시사보도프로그램의 형식변화 현상을 중심으로에서 인용)
“양면균형이냐, 일면돌파냐 인데 PD저널리즘은 일면돌파이다. 한국사회 전체의 평균을 위해 마이노러티에 가중치를 부여하고 방송이 그들의 대변창구가 된다.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에서 다윗을 돕는 것이다” (PD수첩 PD 인터뷰, 방송문화진흥회, 2004, PD저널리즘의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에서 인용)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탄핵 반대쪽으로 편향된 방송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렇다면 시대정신을 공정성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한 것인가? 물론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탄핵반대를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시대정신을 공표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특정한 정치적 세력이 주장하는 시대정신이 공정방송의 조건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특정한 이념이나 의견을 시대정신으로 삼자는 주장의 공표를 허용하는 것과 그것을 공정방송의 잣대로 삼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사안이다. 즉, 특정한 정치적 의견과 이념을 시대정신이라고 보는 주장을 하나의 사실로서 보도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탄핵반대 편들어도 좋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탄핵반대가 시대정신이라면, 탄핵찬성도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정신을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현실적으로 국민 모두가 합의하는 하나의 시대정신이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대립적인 시대정신들이 경쟁, 투쟁, 갈등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상파 방송의 역할은 특정한 시대정신을 옹호, 선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시대정신들이 합리적 논쟁이 통하는 공론장에서 검증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시대정신의 ‘무오류성’를 단정하고 ‘역사의 심판관’으로 자처하기보다는 여러 ‘시대정신들’ 간의 활발한 논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떤 시대정신을 받아들일지는 다양한 의견을 접하고 충분히 숙의한 후에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현명한 선택에 달려 있다. 공익을 구현할 책임을 안고 있는 방송은 대립적인 시대정신들이 합리적인 논쟁을 통해 타협, 절충, 합의과정에 진입할 수 있도록 공론장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앞세우는 시대정신이 절대로 옳은 것이므로 다른 시대정신을 공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종종 양심의 자유 혹은 방송의 자유라는 가치로 정당화를 꾀한다. 제작진이 옳다고 믿는 시각을 부각시키는 것이 언론의 자유보장 차원에서라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틀린 주장은 아니다. 당연히 제작진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방송제작 현장을 고려해 볼 때 두 가지 문제점을 야기한다. 첫째, 사회에서는 두 개 이상의 시대정신들이 대립하고 있는데 공영방송사의 제작진은 왜 특정한 시대정신만을 반영하려고 하는가, 혹은 과연 공영방송사내에는 다른 시대정신을 말하는 제작진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가능한 답변이 있다. 하나는 다른 시대정신을 말하고 싶은 제작진이 존재하지만 방송사 조직 내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로 다른 시대정신을 믿는 제작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이다. 어느 답변이 맞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전자의 경우라면 제작진의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는 기제가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후자 경우라면 공영방송이 제작진이 내세우는 시대정신과는 다른 시대정신을 주장하는 상당수 시청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는 시대정신만이 옳다’고 보는 제작진의 독단적 사고는 더 높은 수준에서의 시대정신인 우리 사회의 헌법질서 -자유민주주의- 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시대정신이라고 주장하는 것까지도 공표함으로써 시민들이 어떤 시대정신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숙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에서 강조하는 ‘관용’ 혹은 ‘포용’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관용과 다양성 혹은 균형성은 반드시 프로그램 내에서만 관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제작진이 어느 시대정신을 표방하여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다른 제작진이 다른 시대정신을 통해 동일사안을 다루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BBC의 제작가이드라인이 명시하고 있듯이 공정성개념은 단일 프로그램 내(within a program)에서 뿐 아니라 프로그램들 간(between programs)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단일 프로그램이 특정한 관점(시대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논쟁적 사안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의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길을 터줄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제작현장에서는 시대정신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공정성의 기준이 명시되어 있는 제작지침이나 강령에는 ‘시대정신’이란 용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현재 방송사는 자체적으로 채택한 실천규칙에 따라 양적, 질적 차원의 균형보도를 공정성 실천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또한 자체적으로 제작한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에서도 정확성과 균형을 가장 핵심적인 비평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만약 특정한 ‘시대정신’을 공정방송의 핵심 기준으로 보고 싶다면, 시대정신 개념을 조작적으로 정의하고 이에 따라 마련된 구체적인 실천규칙에 기초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방송을 특정 시대정신 선전도구로 삼자는 내부 규칙을 세우는 우를 범하게 된다.

또한 최근 방송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낸 연구들은 보면 방송사 내부에서도 논쟁적인 사안을 특정한 시대정신을 앞세우면서 제작하는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김연식 외, 2005; 문소현, 2005). 특히 전통적 저널리즘 가치를 존중하는 기자 집단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좋은 저널리즘의 기준에 대해 PD들과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기자들을 인터뷰한 연구에서 인용한 내용인데, 인터뷰에 응한 기자들은 방송의 공정성 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문소현, 2005).

“솔직히 PD저널리즘이라고 일컬어지는 프로그램 중에서 인터넷 등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정서와 약간이라도 어긋나는 시각을 본적이 없다. 예를 들어 탄핵이 잘못됐다는 정서만 있지, 그와 반대되는 PD 리포트를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면서 그것을 확 불질러 버리는 그런 역할을 한 것이지 반대되는 역할을 한 적은 없지 않나. 반대쪽에서 볼 때는 상당히 공정성을 잃었다고 할 만 한다.” “PD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문제점은 목표를 정해놓고 제작한다는 것이다. 결론을 정해놓고 끼워 맞추는 식이다. 그렇게 하면 극적인 효과는 굉장히 높겠지만, 공영방송 보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 공정성이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 때 노사모만 다루고 창사랑은 다루지 않은 것, 선거에 미치는 영향과 야당의 반발을 고려해야 했다. 노사모를 다루면 결국은 미화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그런데 이에 대한 사전고민이 없다.”

“탄핵보도와 관련해 당시 총선을 앞두고 PD가 만드는 프로그램에서 탄핵이 정당한가를 다루었는데 결국 다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내용이었다. 보도국 시각에서 보면 방송을 해서는 안 되는 시점이었다. 기자는 그 내용이 선거 시기와 관련해 어떻게 해석이 될 것인가 까지 다 고려하기 마련이다. 과연 정당한가, 재판관 같은 심정으로 임하기 때문에 기자적 시각에서 보면 편파보도가 분명한데, PD들한테는 아니다....그런데 그런 이미지가 우리한테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4) 방송의 상업주의가 공정성에 미치는 영향
2004년 대통령 탄핵관련 방송이 편파성 논란을 낳은 것은 방송제작진이 공정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선정성을 부각시키는 상업주의적 보도방식이 방송의 불공정성을 더욱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흥미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 자극인적인 장면을 반복적으로 방영함으로써 편향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겠다. 국회에서 정치인들이 울부짖고, 고함치고, 서류뭉치를 던지고, 밀고 댕기는 모습과 대통령이 탄핵당할까 우려하는 길거리 인터뷰의 반복적으로 방송하거나 탄핵안 가결이 부당하다고는 느낌을 사실과 섞어 시청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방송진행 등은 모두 이 사건의 선정주의적 특징을 크게 부각시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대통령 탄핵은 국가의 중대 사안이므로 많은 시간을 할당하여 자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방송은 이 사안을 선정주의적으로 다루어 시청자의 흥분과 분노를 자극하기 보다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양측의 주장과 그 논거를 전달함으로써 합리적 토론과 숙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보도가 더욱 바람직하다. 방송진행자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표출하여 보도내용이 특정한 방향으로 해석되도록 유도한다면, 이는 고의적으로 편향성을 부추기는 행위나 다름없다. 다양한 의견이나 논평은 스튜디오 인터뷰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얼마든지 전달할 수 있다.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의해 ‘악’으로 규정한 측은 비하하는 방송진행이 일부 시청자들에게는 통쾌감을 줄지 몰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시청자의 눈에는 편파적인 방송진행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과 생방송 시사투나잇는 진행방식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전자의 진행자의 의견개입을 지양하는 반면, 후자에서는 의견개입을 용인하고 있다. 의 진행자는 기자 리포팅이 끝나면 아무런 멘트 없이 다음 기사로 넘어가는데, 생방송 시사투나잇과 추적60분은 리포팅이 끝난 후에 진행자가 ‘총정리’하는 멘트를 하면서 ‘누가 비난받을 대상인지’를 재차 부각시킨다. 생방송 시사투나잇 진행자들은 대화하거나 맞장구를 치는 가운데 더욱 강도 높은 논평이 나오는 경향을 보인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그밖에도 표정, 몸짓, 어투, 판단, 추론, 개인적 경험소개, 정책대안 제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있다 (윤영철, 2005).

방송진행자의 퍼스넬리티를 강조하거나 보도프로그램 진행자의 의견개입을 허용하는 관행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상업주의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시청자의 파편화 혹은 분화현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방송진행자가 특정세대, 혹은 계층의 시청자들에게 소구할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정치적 성향을 반영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매체가 젊은 세대의 뉴스소비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일부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 논평을 내놓거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내보냄으로써 그들의 눈길을 끌려고 한다. 이렇듯 상업주의 논리에 따르는 제작관행은 방송의 공정성 확보를 훼손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4. 결론

공영방송이 국민적 신뢰를 확보한다면 공영방송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튼실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영방송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면 적어도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 공정보도를 실현해야 하며, 둘째 선정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야 하며, 셋째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공영방송의 저널리즘을 분석대상으로 삼은 이 글에서는 특히 공정성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공정성을 회복해야만 공영방송에 등을 돌린 시청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KBS 수신료 인상의 가장 선차적인 조건도 다름 아닌 공정보도를 통한 신뢰구축이다. KBS도 자체 경영평가 보고서를 통해 이미 2004년 대통령 탄핵방송의 공정성관련 문제점을 시인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근에 한국언론재단이 발간한 연구보고서(한국언론재단, 2005)에서도 방송의 “시사정보 프로그램 진행에서 개인의 주관이 포함된 사건해설 혹은 사적 견해의 개입이 문제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 방송 공정성 문제의 초점은 공정성 판정 논란을 넘어서서 공정성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공영방송이 채택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공영방송 스스로가 자신의 활동을 점검하고 성찰하여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제도와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다. 언론학회가 발표한 보고서(대통령 탄핵방송 보고서)에서 불공정성을 지적했을 때 공영방송이 ‘공정성에 문제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반박 선언문을 채택한 것은 바람직한 처사가 아니었다. 정말로 공정성 문제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탄핵방송내용을 조사한 후에 문제가 없었다면 그 결과를 공표하고 문제가 있었다면 그 해결책을 내놓았어야 했다. 탄핵방송 보고서가 발표 된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 별도의 조사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길리건(BBC) 기자의 이라크 대량학살무기 관련 보도의 문제를 계기로 해서 영국 정부가 의뢰한 허튼(Hutton) 보고서가 나오자 BBC는 자체 조사팀을 구성하여 문제 점검과 해결책을 담은 닐(Neil) 보고서를 발간했다. 공영방송사 외부에서 보고서를 통해 문제를 지적했을 때 공영방송사 자체적으로 조사한 또 다른 보고서를 통해 문제를 점검하고 대응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선진화된 모델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진척되어 정권의 공영방송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약화되었다고 해서 방송의 공정성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내부의 자율적 통제 메커니즘이 효과적으로 작동해야만 공정성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권의 개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방송제작진의 자율성은 과거에 비해 신장되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외부규제기관의 책임도 있겠지만, 무엇다도 중요한 이유는 방송사 내의 자율규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방송사고 등, 공영방송이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들은 자율규제로 걸러졌어야 할 사안들이었다.

자율규제 제도를 정상화시키지 못한다면 공영방송은 외부로부터의 규제에 직면한다. 외부규제는 방송사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자율규제로 방송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 사실 방송의 편파성을 지적한 탄핵방송 보고서에 대해 공영 방송사들이 한 목소리로 비판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보고서가 외부규제의 근거로 작용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공영방송사가 집단이기주의나 ‘고성불패’의 태도로 외부 비판에 대응할 때가 아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를 놓고 문제를 진단을 한 후에 조직혁신을 통해 자율규제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 공영방송이 자율적 규제를 게을리 하여 편파성 논란에 계속 휘말린다면 시민사회의 공영방송에 대한 비판은 더욱 심해질 것이고 편파방송을 문제 삼는 제2, 제3의 보고서가 나올 수도 있다. 특히 2006년의 지방선거와 2007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인 출연제한을 완화한 상황이어서 방송의 공정성이 다시 쟁점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

시청자들은 정권의 향방과 관계없이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켜낼 수 있는 공영방송을 바란다. 공익을 추구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할 책임을 안고 있는 공영방송은 정치선전을 위한 정파적 매체, 영리추구를 위한 상업적 매체 그리고 사회운동단체들이 참여하는 대안적 매체와는 다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공영방송은 ‘보편적 공론장’을 제공할 수 있는 핵심미디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 따라서 이념과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이 시청하면서 공통경험을 쌓고 숙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펼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임라고 하겠다. 공영방송이 이런 책임을 완수할 때 우리도 영국의 BBC에 견줄만한 ‘좋은 공영방송’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공영방송의 권위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자기관리와 꾸준히 축적해 놓은 신뢰감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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