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은 수천미터 아래 땅속에서 부글거리며 끓다가 어느 순간 땅가죽을 뚫고 수천미터 높은 하늘마저 뒤덮어 버린다. 전인권의 목소리는 바로 그와 같았다. 억눌렸던 자신의 내면이 어느 순간 두터운 껍질을 뚫고 솟아나와 세상에 물려퍼지게 된다. 아아 저것은 나의 노래다.
한 귀에 매료되어 버린 이유였다. 좁고 낮은 다락방이었다. 겨울이면 찬바람이 그대로 머물지도 않고 스쳐가던 허술하고 어두운 필자의 공부방이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의지해 듣던 낡은 라디오에서 어느날 그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머리를 커다란 망치로 후려치듯. 심장을 드릴로 후벼파듯. 왈칵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필자 자신이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 아직도 필자는 그때 필자를 눈물짓게 만든 그 '내 세상'을 찾아 헤매고 있다.
바로 그것이 전인권의 노래였다. 전인권만의 노랫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였다. 그토록 닮고 싶어했던 그의 목소리였다. 다른 어느 가수와도 달랐다. 그의 샤우트는. 그것은 말 그대로 포효였다. 억눌린 야성이었다. 자유롭고 싶은 본능이었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목줄에 매인 맹수처럼, 그러나 아직 야성을 간직한 맹수는 결코 어떤 억압과 폭력에도 길들여지지 않는다. 왕에게 선택이란 죽거나 혹은 자유롭거나 그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세상에 정의란 차고 넘친다. 너무 정의로워서 문제다. 그래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이란 지극히 개인적이며 상호적인 감정이다.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고 당신으로부터 사랑받는다. 자신의 이야기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보편이라는, 상식이라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정의라는,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그런 너무나 정의로운 현실 속에서 결코 정의롭지 않은 자신을 이야기한다. 바로 젊은 그들의 목소리였다. 민주화를 넘어선, 오랜 열망이던 민주주의와 자유를 넘어선 본질적인 존엄에 대한 회복이며 주장이었던 것이다.
들국화가 갖는 가치였다. 들국화의 중심에는 전인권이 있었다. 그의 삶이 바로 그러했었다. 법조차 그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세상의 도덕적 관념이나 세상사람들의 비난이 그를 강제하지는 못했다. 법이 죄라고 하고,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이라 하는 그것을 그는 신념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몇 번이나 처벌을 받아가며 끝까지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아내와 그의 팬들이 바꿔 놓았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를 억압할 수 없지만, 사랑은 그를 바꿀 수 있다. 사랑이 세상을 바꾼다.
들국화 음악의 중심은 물론 최성원이었다. 들국화 멤버 가운데서도 곡쓰기는 물론 음악적 역량에 있어 가장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노래도 전인권에게 들려주면 곡을 쓴 자신마저 놀랄 정도로 전혀 다른 노래가 되어 있었더라는 최성원 자신의 말처럼 들국화의 색깔을 정의한 것은 다름아닌 보컬 전인권이었다. 그래서 그룹에서 보컬을 포스트맨이라 부른다. 들국화가 해체되고 전인권은 최성원에 결코 뒤지지 않은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낸다. 사람의 목숨이란 가장 뛰어난 악기이며 그 악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음악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최성원과 전인권, 그리고 1집 발표후 탈퇴하고 미국으로 떠난 조덕환, '추억 들국화'까지 전인권과 함께 했던 이제는 세상에 없는 가장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 허성욱, 여기에 1집시절 세션으로 시작해서 2집에서는 어느새 정식멤버로 합류한 이번 방송에 출연한 주찬권과 기타리스트 최구희가 있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최고의 실력을 뽐내던 최고의 아티스트들이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최고의 멤버로 이루어진 2집은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이내 그룹의 해체로 이어지고 말았다.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 시절이 고통 그 자체였다고 하니 최고의 천재들로 이루어진 그룹의 내홍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들국화가 해체되고 전인권과 허성욱이 주도해 발매한 '추억들국화'의 앨범에는 들국화의 멤버 이름이 모두 실려 있었다. 사실상의 들국화 2집앨범이었다.
참고로 당시 들국화가 해체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후일 이야기되었던 것이 바로 멤버들의 경제적 문제였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룹은 돈이 되지 않는다. 방송출연도 않고 공연으로만 돈을 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앨범을 팔아봐야 인세는 들국화의 멤버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앨범을 판 모든 수익은 음반회사의 것이었다. 아티스트는 단지 음반이 크게 히트를 쳤을 경우 보너스조로 얼마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멤버들 모두 돈은 해체되고 나서 솔로로 활동하며 그때 거의 벌었을 것이다. 80만장이나 음반이 팔려나갔는데도 가난했다니. 하지만 그것이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현실이었다.
아무튼 기념비적인 음반이었고 상징적인 밴드였다. 격동기였다. 시대의 경계였다. 그들이 노래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들은 여명에 있었다. 여명에 수탉처럼 포효로써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언더그러운드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갈고닦은 그들의 무르익은 음악적 역량 역이 이때까지 없었던 것이었다. 해외의 팝과 국내의 토착음악이, 다운타운의 젊음과 클럽의 노회함이 그들을 중심으로 만나고 융해되었다. 84년 이전까지의 모든 음악이 들국화에게로 모였고, 들국화 이후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의 역사가 다시 쓰였다. 어찌 그들을 말 몇마디로 단정지어 쓸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필자는 그렇게 무도하지 않다.
놀러와라고 하는 예능프로그램이 갖는 가치일 것이다. 시청률을 넘어선 가치인 것이다. 당연히 오래된 프로그램은 익숙함을 넘어 지루해지고 식상해지기 쉽다. 새로운 포맷의 신선한 재미에 사람들의 눈은 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배반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주는 프로그램의 존재란 것도 때로는 매우 소중하다. 세시봉이 그랬고 이번에 들국화가 그랬다. 과연 놀러와가 아니고서 어느 예능프로그램이 이 오래고 서툰 예인들을 반가이 맞아줄 수 있을까? 여느 음악프로그램들에 비해서도 더 음악적 진정성이 느껴지는 놀러와의 무대는 MC들을 따라 필자 역시 절로 눈물짓도록 만들었다. 김나영의 눈물은 그녀가 오히려 들국화에 대해 무지하기에 더 갚지다. 그것이 바로 진심이고 순수인 것이다.
건강해진 전인권이 반가웠다. 말로만 듣던 주찬권을 TV를 통해 볼 수 있어 너무 즐거웠다. 그의 드럼은 여전히 다이나믹하다. 최성원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세월의 두께를 절절히 느끼게 해주는 연주와 노래가 감히 감사하다는 말조차 송구할 정도다. TV란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해줄 수 있다. 시간이 멈추었다.
몇 주를 기다렸다. 오늘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렇게까지 설레며 TV앞에 앉아 기다려 보기는. 오랜만에 들국화의 공연을 찾아봐야겠다. 전인권도 최성원도 아닌 들국화다. 마침 가을이다. 바람에 가을내음이 물씬 묻어온다. 아름답다. 행복하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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